‘인텔 인사이드’라는 슬로건으로 전세계 반도체 시장을 지배했던 ‘인텔’ 제국이 쇠락하고 있습니다. ‘화무십일홍’이 세상의 이치라고는 하지만, 세계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써 온 인텔의 위기는 새삼 더 크게 다가오는데요. 우리나라 기업들이 현재의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만큼, 인텔의 위기를 남의 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토마토Pick이 세계 ‘반도체 명가’ 인텔의 흥망성쇠를 살펴보고 우리 기업에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짚어 봤습니다.
‘반도체 제국’ 건설한 인텔
-D램 신호탄…제국의 시작 :인텔은 1950~60년대 반도체 산업 개척 시기 쇼클리 반도체를 그만둔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1968년에 설립했습니다. 고든 무어는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은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회사는 1970년 ‘인텔 1103’이라는 D램(메모리 반도체)을 출시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이후 ‘인텔 4004’를 통해 본격적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개발한 ‘인텔 8088’이 IBM PC에 탑재되면서 ‘반도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1980년대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일본의 거센 추격을 받으며 위기를 겪기도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 1986년 반도체 협정 등 일본 제재를 본격화했습니다. 그 틈을 노린 우리나라와 대만이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대만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 주력했고, 현재의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인텔 인사이드’…제국의 완성 :일본과 벌인 반도체 전쟁에서 타격을 입은 인텔은 이후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윈텔’(윈도우+인텔) 동맹을 맺고 메모리 반도체에서 흔들렸던 제국을 다시 공고히 세웁니다. PC에서의 가장 핵심이 운영체제(OS)와 CPU인데 두 기업이 사실상 독점을 한 셈입니다. 이 당시 인텔은 기업 역사상 최고의 광고 문구로 꼽히는 슬로건을 사용하는데요. 바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입니다. PC의 핵심은 CPU이고 그것을 인텔이 만든다는 것을 알리는 광고 전략은 주효하게 맞아 떨어졌는데요. ‘펜티엄’이라는 CPU 제품군을 필두로 PC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인텔은 1992년부터 2016년까지 전세계 반도체 기업 매출 1위를 지키면서 전성기를 보냅니다.
-모바일 시대…쇠락하는 제국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고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텔의 하락세가 시작됩니다. PC에서 모바일로 무게 추가 옮겨가는 것에 대응이 늦었던 건데요. 2000년대 후반, 애플의 요청에도 인텔은 스마트폰 칩 생산을 포기했고 자체 칩을 개발한 애플은 자사 PC인 맥(MAC)에서 인텔칩 사용을 중단합니다. 위기가 지속되자 인텔은 2016년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는데요. 핵심 인력 방출로 기술 주도권을 빼앗기게 됐고, 그 사이 경쟁자 AMD는 인텔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텔은 미래 먹거리 사업 확보에도 실패했습니다. 2017년과 2018년 현재의 AI(인공지능) 열풍을 몰고 온 오픈AI 투자 기회를 놓쳤습니다. 또한 대만의 TSMC에 맞서 진출한 파운드리 부문도 손실 규모가 커지면서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습니다.
2020년엔 정통 엔지니어 출신인 팻 겔싱어를 CEO로 영입하고 핵심 개발자들을 재영입하는 등 활로를 모색했지만, 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코어i 최신 세대의 제품군이 불량 논란에 시달리는 등 악재가 계속됐는데요. 이는 결국 실적의 악화로 이어집니다.
인텔은 지난해에 간신히 적자를 면했는데요. 올해 들어선 1분기 11억 달러, 2분기 16억 달러로 영업손실이 커졌습니다. 특히 3분기 실적마저 월가의 예상을 밑돌 것으로 전망되면서 시가총액도 1000억달러 아래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현재 인력 구조조정과 함께 파운드리 분사, 자회사 매각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시장 분위기는 냉랭합니다. 외신은 인텔의 올해 주가가 60% 떨어지며 우량주 위주의 다우존스 지수에서 제외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예견된 추락
인텔 제국의 몰락은 사실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안주해 스마트폰과 AI 등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게 가장 큰 패착이었습니다. 기술 개발을 등한시했다는 비판도 뒤따릅니다. 인텔이 AI 시대에 내놓은 AI 반도체 칩 ‘가우디’ 시리즈도 너무 뒤늦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미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의 GPU를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내부 관료주의 만연도 쇠락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리프탄 전 케이던스 CEO가 인텔 이사회에서 사임하면서 “인텔의 위험 회피적이고 관료주의적 문화에 실망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요. 이러한 관료주의는 인텔 초창기 멤버인 앤디 그로브가 '안일함이 실패를 낳는다'는 취지로 남긴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경영 철학과 괴리가 있습니다.
국내 기업엔 경종
‘반도체 제국’ 인텔의 몰락은 우리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기술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혁신에 실패해 저물어가는 기업의 사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의식한 듯 글로벌 반도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 기업들도 관료주의 타파와 기술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요.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새로운 조직문화와 근원적 경쟁력 회복 등을 위해 반도체부문 수장을 교체했습니다. SK하이닉스도 승기를 잡은 AI 메모리 반도체(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 초격차 기술 확보를 위해 매진 중입니다.
인텔 제국의 쇠락은 우리 기업들의 반면교사가 될 뿐 아니라 또 다른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요. 인텔이 명가의 저력으로 재기에 성공할 것인지, 혹은 인텔을 집어 삼키는 또 다른 제국이 등장할지 향후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