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리오 버라드커 총리가 돌연 사임한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나이 45세. 역대 최연소 총리였을 정도로 정치인으로서는 창창한 때인데도 그는 사임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내달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겨야 합니다. 아일랜드의 현대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그의 조기 사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토마토Pick은 아일랜드와 유럽 극우화의 상황을 짚어봤습니다.
최연소, 첫 게이 총리
버라드커는 누구
리오 버라드커는 현 아일랜드의 총리입니다. 2007년 하원 선거에서 출마한 이후 교통관광체육부와 보건부, 사회보호부 장관 등을 역임한 끝에 2017년 처음으로 총리에 당선됐습니다. 이후 피어너팔 등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2020년부터 2022년까지는 부총리, 2022년부터 현재까지 총리로 지내며 사실상 7년간 아일랜드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역대 총리들 중에서도 특히 이색적인 기록이 많은 인물인데요. 우선 그의 아버지는 인도 뭄바이 출신입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인도계인 첫 혼혈 총리가 됐습니다. 또 1기 집권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로 당시 기준 최연소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2015년 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논쟁이 뜨거울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는데요. 때문에 첫 ‘게이 총리’라는 수식어까지 달았습니다.
가장 보수적인 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총리
버라드커 총리는 가장 진보적인 총리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남긴 굵직한 이슈들 때문인데요. 일례로 2015년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거친 후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2000년대 이후 벨기에, 스페인, 스웨덴 등 각국에서 동성혼을 허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적 흐름이나 다름없지만, 아일랜드는 한때 동성애가 범죄였을 정도로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입니다. 그런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것인데요. 이 과정에서 당시 보건부 장관이던 버라드커 총리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성 정체성을 밝히는 일)하면서 투표를 독려했습니다. 이어 2018년에는 총리로서 낙태 금지법을 폐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아일랜드는 1861년 처음 낙태금지법을 제정한 이래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었는데요. 버라드커 총리는 “법을 바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으라”며 투표를 독려하고 헌법 개정을 촉구했습니다. 그 결과 2018년 아일랜드는 1983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8조를 폐지하고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 중 한 곳으로 꼽히던 아일랜드에서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국민투표 패배 책임지나
버라드커 돌연 사임 선언
그런 버라드커 총리가 지난 20일(현지시각) 돌연 사임을 선언했습니다. 버라드커 총리는 “리더십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줄 때를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자신의 사임 사유로는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버라드커 총리는 왜 사임했을까요?
-국민투표 실패 :아일랜드는 지난 8일 가족과 여성에 대한 정의를 현대화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가족의 단위를 ‘결혼에 기초한 관계’에서 비혼 부모 등 ‘지속 가능한 관계’로 확대하는 것과 가정에서 돌봄 범위를 ‘가정에서 어머니의 의무’에서 ‘가족구성원이 제공하는 것’으로, 즉 여성의 역할을 규정한 표현을 고치는 내용이었는데요. 그러나 국민투표에서 큰 차이로 부결됐습니다. 이는 버라드커 총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었습니다.
-반이민정서 확산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 :최근 아일랜드에 망명 신청이 급증하면서 유럽의 이민 문제가 아일랜드에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후 유럽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약 10만명)을 수용한 나라가 아일랜드일 정도입니다. 인도계 혼혈인 버라드커 총리는 난민들에게 정부 지원 주거지역을 내주는 등 이들을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는데요. 이러한 행보는 극우세력과의 정면충돌을 야기했습니다. 이민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극우와 이민자의 갈등은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고, 반이민을 내세운 무소속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가 오르는 양상도 보였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엑스(X, 옛 트위터)에 “리오 버라드커는 자국민을 증오한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위기 :국민투표 실패, 난민 수용 문제는 버라드커 총리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AP통신에 따르면 당내에서도 소속 의원의 약 30%가 버라드커 총리에 반대해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민 문제와 이에 결합된 주택난 등 현안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혼혈·동성애 한계 :버라드커 총리는 임기 내내 혼혈인 점과 성소수자인 점을 공격받아 왔습니다. 한때는 동성애 혐오를 내세운 극우파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부총리로 재직하던 2021년에는 그 강도가 높아져 경찰로부터 이사를 권고받기도 했습니다.
아일랜드 새 총리 누구
더 어린 37세 해리스
버라드커 총리의 후계자는 37세의 사이먼 해리스 고등교육부 장관입니다. 그는 24일(현지시각) 통일아일랜드당(피너 게일, Fine Gael) 대표로 확정됐으며 부활절 휴회 이후인 내달 9일 의회에서 정식으로 총리에 선출될 예정입니다. 그는 기존 버라드커 총리의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갱신할 예정인데요. 젊은 유권자와 소셜미디어로 소통해 ‘틱톡 총리’라고 불리는 인사입니다.
극우화 시작인가 미풍인가
계속되는 유럽의 걱정
현지 언론은 버라드커 총리의 사임을 두고 ‘유럽 극우화의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성차별과 이민 문제 등에서 진보적인 행보를 보인 버라드커 총리가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NYT)에 의하면 데이비드 퍼렐 더블린대 정치학과 교수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민이 아일랜드에서 갑자기 거대한 화두가 됐다”며 “극우 의제가 아일랜드에 뿌리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해 왔는데, 안타깝게도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우화의 물결은 비단 아일랜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포르투갈은 극우정당 셰가(Chega)가 18.1% 득표율을 기록하며 원내 3당을 차지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극우 자유당이 승리했으며 이탈리아는 2022년 극우 성향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취임했습니다.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극우 돌풍이 불 수 있다고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버라드커 총리의 사퇴가 유럽 극우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가 될까요? 잠깐의 이슈로 끝날까요? 지켜봐야 할 대목입니다.